봄볕 눈 녹듯 편안함에 녹아들다… 교토 철학의 길 끝에서 멈춘 걸음

일본 '교토 이치조지(一乘寺)'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일본 '교토 이치조지(一乘寺)'
일본 교토(京都)에는 불교 사찰이 1500개가 넘고 신사는 200개가 넘는다. 인구 150만 도시에 사찰이 1500개라면 동네 구석구석 불교 사찰이 있다는 말이다.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하루 종일 유명한 사찰, 신사만 구경하고 다녀도 일 년은 족히 걸릴 양이다.

그러나 유명한 관광지가 늘 그렇듯 사람이 몰리는 곳에 가면 제대로 그곳의 역사를 느낄 수도 없고 사람을 볼 수도 없다.

더군다나 최근 교토로 가는 관광객이 많이 늘다 보니 청수사, 금각사 같은 주요 사찰은 같은 처지의 관광객들과 이리저리 쓸려 다니다 비슷한 사진을 몇 장 얻어 나오는 게 다반사이다. 그곳을 찾는 개개인에게 그런 사진 몇 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 역시 관광객 처지로 그곳에 들락거리지만 유명하다는 곳은 그 도시를 대부분 이해한 다음에 가서 볼 요량으로 뒤로 한참 밀어놓았다.

우선은 사람이 사는 동네를 찾아갔다. 조사를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대로 아무 곳이나 가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그곳에 머물며 조금씩 탐사 범위를 넓힌다. 그건 어릴 때 서울의 골목을 뒤지고 다니며 놀던 시절 터득한 나만의 여행 방식이다.

나의 기준과 여러 가지 우연이 겹쳐서 알게 된 곳이 이치조지(一乘寺)라는 동네였다. 이치조지는 교토 동북부에 있는 조용한 주택가이다. 지명은 분명 절의 이름에서 유래한 듯한데, 그런 이름을 가진 절은 예전에 사라졌는지 동네에도 없고 지도에는 없다. 그곳은 아주 유명한 관광코스인 철학의 길 끄트머리, 은각사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나온다.

이치조지에는 첫눈에 확 들어오는 특별함이라곤 없다. 일본 전통 가옥과 현대식 집들이 섞여 있는 정연한 골목이 이어지다가 중간중간 물길이 나오고 작은 논이 나오기도 한다. 주택가 사이에 논이 있는 풍경은 무척 뜬금없기도 하지만 무척 편안하다.

그 위로 기찻길이 포개진다. 기찻길 위를 달리는 기차는 사실 한 량 혹은 두 량짜리로, 아주 짤막해서 '길으면 기차'라고 우리가 부르던 동요가 무색해진다. 기차가 지날 때 스피커에서 딸랑딸랑 신호음이 나오는데, 전혀 위협적이지 않고 정겹게 들린다.

그리고 차단기가 내려진다. 자기 갈 길을 가던 자동차나 자전거 그리고 사람은 막아선 차단기 앞에 멈추게 되고, 딸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멀뚱히 쳐다볼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이윽고 짧은 기차가 마주한 시선을 쑥스러워하며 금세 가로지르고 2~3분 만에 길은 다시 열린다.

동네 풍경만 보자면 무척 평화롭고 목가적이다. 영락없이 1960년대 서울의 어느 후미진 동네에 뚝 떨어진 느낌이 들어 마음이 봄볕을 받은 눈처럼 한없이 녹아내린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발을 멈추게 되었고, 차단기에 멈춰진 것처럼 그냥 서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네가 눈에 익을 즈음 찬찬히 들여다보니 다른 켜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이치조지 주변에는 교토대, 교토조형예술대 등 대학들이 바로 맞닿아 있어, 젊은이들의 밝은 기운이 조용한 주택가에 잔잔하게 배어 있다. 대학가 주변은 학교와는 상관없이 일단 유흥가가 되어버리는 우리네 풍경과는 달리 서점이 있고 중고 서점도 있다. 사실 대학 앞에 서점이 있고 학생들이 있는 풍경에 감동하는 것 자체가 아주 이상한 일이다.

이치조지 역 근처에 게이분샤(惠文社)라는 작은 서점이 하나 있다. 공동주택 일층 상가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그 서점은 사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점이라고 한다. '세계적'이라는 수식에 혹해서 그곳을 찾아갔지만 '세계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대단한 점은 없었다.

서점은 공예품이나 미술품의 전시가 이루어지고 예쁜 문구가 진열되어 있는 칸과, 직원들이 엄선해서 배치한 책들이 꽂혀 있는 칸과, 아기자기한 생활용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판매되는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구든 책이든 뭔가 하나 사들고 나올 수밖에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실 이치조지라는 지명은 라면거리로 더 알려져 있다고 한다. 게이분샤를 지나 서쪽으로 조금 나가면 약간 건조한 4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일본식 라면을 파는 가게가 줄지어 있다. 처음에는 식당이 많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그중에서 닭국물을 진하게 우려내는 라면집을 찾아갔더니, 가게 앞에 사람들이 그늘에서 조용히 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줄을 서기 위해 그곳을 찾은 사람들처럼 아주 평온하다. 기다림에 대한 짜증이나 조급함은 없어 보인다.

교토에서는 자주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 공중화장실에 들어가기 위해 늘어선 줄 안에서도, 잘 꾸며진 정원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보았다.

그런 담담한 표정은 일본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대단한 만족이거나 대단한 체념으로 보인다. 40여 분 동안 줄을 선 채 조금씩 앞으로 나가다가 식당으로 들어갔다. 세 개 테이블에 열댓 명이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작은 규모였는데,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나온 음식을 먹기 전에 정중하게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치조지 역에서 동쪽으로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를 모시는 신사와 은퇴한 정치인이 조성한 바람도 물도 구름도 운행을 멈출 듯한 정원 시센도(詩仙堂)가 있다.

시센도 옆으로는 모래 정원과 대나무숲 등 일본 정원의 여러 양식이 모여 있는, 단풍이 아름다운 불교 사찰 엔코지(圓光寺)가 있다. 근처에는 왕의 쉼터인 이궁 슈가쿠인리큐(修學院離宮)도 있다.

일상의 풍경과 역사적 문화유산을 가르는 경계는 교토의 주요 관광지를 거의 다 거치는 5번 버스가 다니는 도로이다. 건널목 앞 오래된 과자점에서 일본 정원의 하얀 모래에 놓인 돌을 이미지화한 달콤한 케이크를 먹었다. 입안으로 다양한 시간과 풍경이 녹아들었다.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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